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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ain't over till it is over.
유화정책은 무엇일까? 본문
17. 9. 14에 쓴 글.
북한의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시험이 연이은 가운데 우리 정부의 '유화'정책의 실패를 성토하는 글이 연이어 보인다. 트럼프는 북한의 6차 핵실험 이후 한국의 유화정책은 실패했다고 트위터에 글을 올렸고 국내 여론도 문재인 정부가 유화정책을 이제 그만둬야 하는게 아니냐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유화정책이 과연 성공적일 수 있는지, 문재인 정부가 유화정책을 정말 하고 있는지에 대해 논의하기 전에 먼저 유화정책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야기하는 대상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고 논쟁을 하게 되면 허수아비를 때리기 쉽다. 유화정책만큼 좋지 않은 '이름표'가 붙여진 개념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더욱 개념정의를 명확히 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국제정치학계에서는 유화정책, 즉 Appeasement를 어떻게 정의할까? 흥미롭게도 유화정책에 대한 언급은 많이 발견할 수 있지만 명확한 개념정의를 찾는 것은 의외로 쉽지 않고, 유화정책의 성패 요인에 대해 분석한 연구도 흔치 않다. 그러나 개념정의를 시도한 학자들이 몇몇 있었다.
먼저 Daniel Treisman의 연구를 보면 유화정책이란 "분쟁을 지연시키거나 혹은 피할 목적으로 도전국 혹은 잠재적 도전국에게 일방적으로 양보하는 정책"이다. 1 The Rise and Fall of the Great Powers로 유명한 Paul Kennedy는 유화정책을 "합리적인 협상과 타협을 통해 [적대국의] 불만을 인정하고 만족시켜줌으로써 갈등을 해결하는 정책"으로 정의한다. 2 Stephen Rock은 유화정책은 "다툼과 갈등의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적국과의 긴장을 줄이는 정책"이라고 정의한다. 3마지막으로, Norrin Ripsman과 Jack Levy는 유화정책을 "어떤 위협에 직면해서 국가들이 전쟁을 피하기 위해 최소한 단기적 기간 동안 지속적이고 비대칭적인 양보를 하는 정책"으로 정의하고 있다. 4
여러 가지 정의가 있지만 모두가 다 적절하진 않다. 예를 들어 Rock의 정의는 너무 포괄적이다. 다툼과 갈등의 원인을 제거한다는 것이 반드시 양보나 평화적인 수단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김정은 개인이 갈등의 원인이고 효과적인 참수작전으로써 그를 제거한 뒤 나타난 보다 평화적인 정권과 좀 더 평화로운 관계를 수립할 수 있다면 참수작전도 유화정책의 범위에 속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유화정책과는 너무 다르다. Kennedy의 정의도 비슷하다. 우리가 유화정책이란 단어에서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것은 뭔가 우리가 부당하게 더 양보하고 있다는 이미지일 것이다. 그러나 합리적 협상에서 등가교환을 통해서 갈등이 해결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한국과 미국이 확고한 핵 억지력과 재래식 군사력을 바탕으로 북한과 협상해서 북한에게 "핵 프로그램을 전면 폐기하지 않으면 평양이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이고, 그러나 만약 핵 프로그램을 폐기한다면 우리가 경제 원조 및 평화 협정 회담에 착수하겠다"라는 제안을 해서 북한을 설득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합리적인 계산에 기초해서 갈등을 해결하는 정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나리오가 우리가 생각하는 유화정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개념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반드시 같을 필요도 없지만 너무 동떨어져서도 안 된다. 그 점을 고려하면 Kennedy의 정의도 너무 포괄적이다.
그런 점에서 Treisman과 Ripsman/Levy의 정의가 더 유용해보인다. 유화정책이라는 것은 최소한 "비대칭적", 즉 한 쪽이 더 많은 양보를 하는 것, 이거나 "일방적", 즉 뭔가를 얻지 못한 채 양보만 하는 것 이어야 한다. 목적은 군사적 충돌을 막는 것이다. 군사력을 사용하는 것은 언제나 비용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국가들이 외교를 정책 수단으로 쓰는 것은 그것이 군대를 동원하는 것보다 값이 싸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비용을 대신 부담해준다면 누구나 다 군사력을 사용하려 들 것이다.
이제 우리는 대충 유화정책이 뭔지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았다. 그렇다면 과연 문재인 정부가 유화정책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의 핵 실험 및 탄도미사일 발사 시험 이후 문재인 정부는 미사일 탄두중량 제한 해제에 대해 미국으로부터 합의를 얻어냈다. 이것은 당연히 유화정책이라 보기 어렵다.
안보리 대북 제재안 결의 표결 전 문재인 정부는 여러 관련국과 접촉하면서 제재 결의안에 동참해줄 것을 부탁했다. 이것은 유화정책이라 보기 어렵다.
푸틴과의 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원유 공급 중단을 요구했다. 역시 유화정책이라 보기 힘들다.
좀 더 비판을 받는 몇 가지 행보들에 주목해보자.
문재인 정부는 전술핵 재배치 논의에 대해서 청와대의 입장은 확고하며, 전술핵 재배치는 불가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혹자는 이것을 북한에 대한 유화정책이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술핵 재배치 거부가 북한에 대한 "양보"가 되기 위해서는 전술핵 재배치가 대북 억지력을 강화하면서 동시에 여타 정치적 비용이 들지 않거나 그 비용이 억지력 강화로 인한 이득보다 적다는 주장이 타당하게 성립되어야 한다 (경험적 증거가 뒷받침된다면 더 좋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핵무기를 동맹국에게 배치하는 것이 확장억지공약 신뢰도를 높여주지 않는다는 실증 연구가 있다. 이론적으로 고려해봤을 때도, 한국이 전술핵 사용권을 온전하게 쥐고 있지 않는 이상 결국 최종 결정권은 미국에게 있고, 결국 미국이 한국을 위해서 핵을 쏠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계산에는 별다른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 북한이 압도적인 재래식 군사력으로 한미 연합군이 미처 대처하지 못한 사이에 우리 영토를 점령하고 이를 기정사실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전술핵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북한의 재래식 군사력은 뒤떨어진다. 게다가 문제가 되는 것은 북한의 핵이지 재래식 군사력이 아니지 않은가. 결국 전술핵 재배치 거부를 유화정책이라고 주장하기에는 이에 반대되는 전략적 이유가 있다고 봐야한다.
대북 인도지원 및 북한 인구조사 지원은 어떠한가? 이것을 양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 지원정책에 정부가 무언가 조건을 달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정책은 검토 단계에서 핵실험으로 정부가 보류했다 (최소한 내가 찾은 정보에 한해서는 그렇다). 이 정책이 만약 실행되었더라면 이것을 양보라고 더 강하게 주장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실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양보라고 보긴 어렵다.
원유수출 전면 금지를 조항에 넣는데 실패한 대북 제재를 '성공'이라고 평가한 것도 유화정책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앞서 살펴본 어떤 정의와도 부합하지 않는다. 정책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있을 수 있고 모든 평가가 올바를 순 없지만 틀린 평가를 했다고 해서 그것을 유화정책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확실한 건 유화정책이란 뭔가 양보해야 한다.
요즘 내가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해서 빼먹은 사례가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몇 가지 사례에서 유화정책이라고 부를만한 요소를 포함한 행동은 발견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가 하고 있는 "유화정책"이란 대체 무엇인가? 협상을 주장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유화정책을 의미하지 않는다. 상대방의 행동을 바꾸기 위해서 반드시 대화를 할 필요는 없지만, 대화를 해야할 때도 있는 법이다. 대화장에 나가서도 군사적 위협을 할 수 있다. 누군가가 그토록 원하는 위협 말이다. 면대면으로 대화함으로써 의사전달을 더욱 명확히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국제정치에서 평화달성을 어렵게 만드는 핵심 요인 가운데 하나는 상대방의 의도를 확인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더 확실하게 내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서 국가들은 여러 수단을 사용한다. 그것이 때로는 정상회담도 될 수 있고 위협도 될 수 있고 군사훈련도 될 수 있다. 대화를 아예 하지 않는다면 Tacit negotiation 만으로 상대방을 행동을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Tacit negotiation은 모두가 쉽게 인지할 수 있는 focal point가 없으면 이뤄지기 쉽지 않다. 그리고 남북 관계에서 그런 focal point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럼 별 수 있나. 이야기를 해봐야 한다. 지금 당장 주먹을 휘두를게 아니라면, 때로는 그게 불구대천지원수일지라도 참고 말을 해야 할 때가 있다. 내 생각엔 그게 오히려 냉철한 현실주의와 더 잘 맞는다.
- Daniel Treisman, "Rational Appeasement," International Organization 58, no. 2 (Spring 2004), 347. [본문으로]
- Paul Kennedy, ed. Strategy and Diplomacy, 1870-1945: Eight Studies (London: Allen & Unwin 1983), 195. [본문으로]
- Stephen Rock, Appeasement in International Politics (Lexington, KY: University Press of Kentuckey, 2000). [본문으로]
- Norrin M. Ripsman and Jack S. Levy, "Wishful Thinking or Buying Time? The Logic of British Appeasement in 1930s," International Security 33, no. 2 (Fall 2008), 15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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