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이 지난 후에 다시 되돌아보는 "좋았다고 생각했던 글"
올해 3월 한국에서 무료하게 지낼 때 썼던 포스팅. 역시나 생각에 큰 변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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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사 과정을 처음 시작할 때였던가. 이제는 정확히 언제였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학문을 직업으로 삼으려는 젊은 학자들을 위하여" 라는 제목의 글을 본 적이 있다 (이화여대 오욱환이라는 분이 작성했다고 한다). 그때 당시에는 굉장히 빠져들면서 읽었던 글이었고 그걸 하나하나 프린트해서 방 벽에 붙여두기까지 했었다.
기억이 맞다면 그로부터 9년이 지난 지금. 얼마 전에 우연히 그 글을 다시 보게 되었다. 이제 박사과정의 끝을 보려고 "계획"하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그 글을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었다. 내가 그때만큼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을까?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어떤 점에서 공감하지 못할까? 왜 그럴까?
어떤 조언은 영원불멸이지만 대부분의 교훈과 조언 등은 시기와 맥락을 잘 감안해서 받아들여야 한다. 검색을 잠깐 해보니 원래 글이 쓰여진 시점은 2009년이었다고 한다. 내가 처음 읽었던 시점이 약 4년 뒤였고, 이제는 약 13년이 지난 시점이니, 과연 그 글에 담겨져 있던 조언과 충고들이 얼마만큼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지 이 시점에서 평가해보는 것도 재밌을 거 같다. 물론 신진 연구자 딱지를 달아볼까 아둥바둥하는 지금 이 시점의 나 라는 주관적인 입장에서 말이다. 대부분의 분야가 그렇겠지만 학계는 결코 "학계"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뭉뚱그려 질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각 세부 학문 분야마다 상황과 관행들이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일반화 하는 것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학자이신 (검색에 따르면) 원저자가 쓰신 글이 다른 학문 분야에 반드시 100% 정확하게 들어맞을 것이라고 맹신할 이유도 애초에 없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내가 내린 평가가 다른 분야에 또 100% 적용된다고 이야기할 수도 없다. 그 점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서 하나씩 이야기해보자면...(따라서 이 글에서 대부분 '학계'라는 단어는 '정치학계'를 의미한다)
•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면, 그에 걸맞은 일자리는 있다”고 확신하십시오.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들은 구직난을 호소하지만, 일자리를 제공하는 사람들은 구인난으로 애를 태웁니다. 신임교수채용에 응모한 학자들은 채용과정의 까다로움과 편견을 비판합니다만, 공채심사위원들은 적합한 인물을 찾지 못해 안타까워합니다. 공정한 선발 과정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공정하게 진행되기를 기원하면서 요구한 조건을 충분히 갖추는 데에 더 힘쓰십시오.
-2022년 지금 잡마켓에도 정말 해당되는 이야기일까? 강한 의구심이 든다. 정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했음에도 일자리를 찾지 못해서 학계를 떠나가고 있다. 내가 그 중 한 사람이 되지 않을거라는 확신도 없다. 작년 우리 학교에선 2명의 신임 조교수를 채용했는데 238명의 지원자가 몰렸다. 이 숫자를 보고 내가 처음 든 생각을 "어 생각보다 되게 조금 지원했네?" 였다. 그만큼 지금 (미국) 정치학계 마켓은..미쳐있다. 게다가 미국 마켓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미국 마켓이 미치면 미국 PhD들은 다른 나라 마켓에도 눈을 돌리기 시작하고, 자연스레 다른 나라 마켓도 경쟁률이 순식간에 치솟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점은 처음 이 글을 봤을 때도 잠깐 했던 생각이긴 한데, 공정한 선발 과정을 기대하기 쉽지 않다면 어떻게 내 노력에 걸맞는 일자리를 구할 수 있으리라 확신할 수 있는걸까?
• 학문에 몰입하는 학자들을 가까이 하십시오. 젊은 학자들에게는 무엇보다도 모형이 되어줄 스승, 선배, 동료, 후배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를 때에는 따라해 보는 방법이 효율적입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스타일을 갖추면 됩니다. 학문에의 오리엔테이션을 누구로부터 받느냐에 따라 학자의 유형이 상당히 좌우됩니다. 학문을 직업으로 삼으려면, 반드시 학문에 혼신을 다하는 사람들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존경할 수 없는 학자들을 직면했을 경우에는, 부정적 기준으로 삼으십시오. 다시 말해서, 그 사람들과 다르기 위해 노력하면 정도(正道)로 갈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를 때에는 따라해 보는 방법이 효율적이다 라는 말은 정말 공감가는 말이다. 그 따라하는 대상이 주위에 연구 열심히 하는 동료건, 교수건, 하다 못해 다른 논문이건. 일단 따라해보고, 하면서 배우게 된다.
• 시․공간적으로 멀리 있는 위대한 학자보다 ‘자신보다 조금 더 나은, 그렇지만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모형으로 삼으십시오. 의식을 해야만 인식되는 사람은 일상적인 모형이 될 수 없습니다. 수시로 접하고 피할 수 없는 주변의 학자들 가운데에서 모형을 찾아야 합니다. 그 모형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될 때에는, 여러분이 이미 그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그 때, 눈을 들어 조금 더 멀리 있는 모형 학자들을 찾으십시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여러분이 훌륭한 학자에 가까워집니다.
-이 부분 역시 매우 공감가는 부분. 의식적으로 상기해야만 하는 사람이 좋은 롤 모델이 되기 어렵다는 말도 어느 정도 공감한다. 시공간적으로 멀리 있는 위대한 학자만 바라봐서는 안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학계의 발전 속도, 변화 속도가 굉장히 빠르기 때문에 80-90년대에 명성을 쌓고 그 이후로 '대가'로 살아온 사람들의 글과 연구 방식이 지금 이 시대에 적합하다는 보장이 없다. 이것은 단순히 트렌드를 따라가는 글만 쓰라는 것이 아니다. 학계가 연구성과를 축적해오면서 새롭게 중요해진 연구 분야가 있고, 학계의 다양한 요구에 따라서 새롭게 등장한 연구 포맷이 있고, 연구 경향이 있다 (단독 연구 v. 공동 연구). 이런 점에서 본받을만한 인물을 찾으려면 가까이 있는 동료 연구자들이 더 좋은 롤모델 후보가 되기 마련이다.
• 아직 학문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가능한 조속히 결정해야 합니다. 이 길이 아니다 싶으면, 곧바로 이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 좋습니다. 학문은 적당히 해서는 성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선택하지 않은 일에 매진할 리 없고, 매진하지 않는 일이 성공할 리 없습니다. 학계에서의 업적은 창조의 결과입니다. 적당히 공부하는 것은 게으름을 연습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게으른 학자는 학문적으로 성공할 수 없으며, 학계는 지적 업적을 촉구하기 때문에, 일상적으로도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부분도 정말 공감한다. 길이 아니다 싶으면 버려야 한다. 조금 다른 맥락일 수도 있지만, 학문의 길을 신성시할 필요도 없고 과다하게 로맨틱하게 바라볼 필요도 없다고 본다. 이건 내가 석사 과정 동안 했던 실수다. 박사 과정에 진학하고 나서야 조금씩 깨닫게 됬다. 이 길은 다른 길보다 그렇게 찬란한 길도 아니고, 성스러운 길도 아니고, 그저 직업 중 하나일 뿐. 너무 과하게 몰입할 필요가 없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다른 분야에서 성공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일에 적당인 사람이 아니지 않을까? 게으른 사람이 학계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 적당히 해서 성공하기 어렵다는 말은 아마 대부분의 분야에도 해당되지 않을까 싶다 (그 점에서 '학문'은 적당히 해서는 성공할 수 없다는 말에는 공감하지 않는 것일지도).
• 읽고 쓰는 일보다 더 오래 할 수 있고 더 즐거운 일을 가진 사람은 학문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읽었는데도 이해되지 않아서 속이 상하고 글쓰기로 피를 말리는 사태는 학자들에게 예사로 일어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읽고 씁니다. 이 일을 즐기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의미를 부여한 일은 어렵고 힘들수록 더 가치 있고 즐거울 수 있습니다. 읽고 쓰는 일을 피하려고 하면서도 그 일에 다가간다면, 학자로서 적합합니다.
-이 부분은 약간..왔다갔다 한다. 기본적으로 학계에서 성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읽고 쓰고 생각하야 한다는 주장에는 공감한다. 읽어도 이해가 안가고 글쓰기로 피가 마르고 (리뷰를 보고 화가 치솟는) 일이 예사로 일어나고, 그럼에도 읽고 쓰는 이유는 어느 정도 즐기기 때문이라는 점에도 공감한다. 그렇지만...난 읽고 쓰는 일보다 게임을 더 오래 할 수 있고 더 즐겁게 할 수 있는걸..그럼 학문에 적합하지 않는 걸까..? 이 부분은 아래 주장에 대한 내 생각과도 조금 연결된다.
• 학문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부족하다면, 대인관계를 줄여야 합니다. 학문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학문에 투입하는 시간은 다른 업무에 할당하는 시간과 영합(zero sum)관계에 있습니다. 학문을 위한 시간을 늘리려면 반드시 다른 일들을 줄여야 합니다.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대인관계를 정리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개인 전화번호부가 보험설계사의 전화번호부처럼 다양하고 많은 인명들로 채워져 있다면, 학문하는 시간을 늘릴 수 없습니다. 물론 대인관계도 사회생활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학문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학문을 직업으로 선택하면 불행해집니다.
-대인관계와 학문에 투입하는 시간이 "반.드.시." 영합 관계에 해당할까 라는 생각에 다소 의문이 든다. 다소 협소한 관점에서 보면 맞을지도 모른다. 대인관계를 학문과 '전혀' 상관없는, 예를 들어 회식/술자리/놀러가기 등등 약간 협소한 관점에서 정의한다면, 이런 일들에 집중하다보면 당연히 연구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테고, 그런 일들에 투자했던 시간들이 내 경력에 긍정적인 효과로 돌아오지도 않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대인관계를 조금 더 폭넓게 정의해서, 같은 학계에 있는 동료 연구자들과의 네트워킹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자면 연구와 반드시 영합 관계라고 보기는 또 어려울 것 같다. 같이 술자리를 하고 밥을 먹어도 동료 연구자와 시간을 보낸다면 그 시간을 보내면서 귀중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고, 공동 연구 기회를 만들 수도 있다. 이런 긍정적인 류의 인간 관계는 내 학문 연구에 귀중한 자산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원저자분이 어떤 식으로 대인관계를 정의하면서 원 글을 썼는지는 나는 알 수 없다. 아마 전자에 조금 더 가깝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 학문 외적 업무에 동원될 때에는 맡겨진 역할을 성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에 헌신하지는 마십시오. 젊은 학자들은 어디에서 근무하든 여러 가지 업무―흔히 잡무로 불리는 일―에 동원됩니다. 선택할 수 있을 때에는 이러한 일을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만, 대부분의 경우는 선택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마련입니다. 그 일을 부탁한 사람들은 젊은 학자들보다 직위가 높고 영향력이 더 큽니다. 그리고 그들은 젊은 학자들이 일하는 자세를 눈여겨봅니다. 잡무를 부탁하는 사람들은 젊은 학자들에게 평생 직업을 제공하거나 추천하거나 소개하는 위치에 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기 싫지만 피할 수 없을 때에는 성실해야 합니다.
-잡무...잡무야 말로 학문에 투입할 수 있는 시간과 영합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닐까 (어떤 방식으로 잡무를 정의하던). 물론 하기 싫지만 피할 수 없을 때에는 성실해야 한다는 말에는 공감하지만.
• 시작하는 절차를 생략하십시오. 논문을 쓸 때 가장 힘든 시기는 시작할 때입니다. 시작하지 않으면, 결과가 나올 리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하면 될 일을 시작하는 절차에 구태여 의미를 부여하고 길일(吉日)이나 적일(的日)을 찾다가 실기(失機)합니다. 신학기에, 방학과 함께, 이 과제가 끝나면 시작하려니까 당연히 신학기까지, 방학할 때까지, 과제가 끝날 때까지 미루게 되고 정작 그 때가 되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새로운 변명꺼리를 만들어 미루게 됩니다. “게으른 사람은 재치 있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가 더 지혜롭다고 생각한”답니다(성경 잠언 27:16). 논문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즉시 그리고 거침없이 많이 기록해두어야 합니다. 적기를 기다리다가는 아이디어를 놓칩니다. 사라진 아이디어는 천금을 주어도 되찾을 수 없습니다.
-이 부분은 100% 공감한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무조건 기록해두고 주위 사람들한테 던져봐야 한다. 반응을 살펴보고, 스스로도 끊임없이 재평가해보고, 어느 정도 괜찮다 싶으면 일단 초록이라도 적어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무엇이 질문이고, 왜 중요하고, 대략적인 내 이론은 이거고, 어떤 데이터가 필요할 것이고, 어떻게 분석할 것인지. 이 정도만 해놓아도 나중에 돌이켜볼 때 이런 일을 안 해놓은 상태보다 아이디어를 다시 떠올리기가 훨씬 쉽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더 해볼만할 것 같은 아이디어라면 일단 무작정 글을 써보고, 데이터 분석까지 해보고, 학과 자체 발표/학회 발표 등에 무작정 던져보는 과정 하나하나가 언젠가는 실적으로 연결되는 것 같다. 내가 현재 들고 있는 워킹 페이퍼와 나중에 가지게 될 출판 실적의 비율은 절.대.로. 1:1이 아니다. 아마 3:1~5:1 정도는 되지 않을까? (특히 신진 연구자 시기 때는)
• 표절은 학자에게 치명적인 오명이 됩니다. 표절은 의식적으로도 그리고 무의식적으로도 일어납니다. 표절에의 유혹은 게으름과 안일함에서 시작됩니다. 표절을 알고 할 때에는 자신에게 관대하고 유리한 변명이 충분히 만들어집니다. 표절하지 않으려면 자신에게 엄격해야 합니다. 모르고 표절할 수 있는데,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발표하기 전에 다른 사람들에게 점검을 받아야 합니다. 글쓰기에 엄격한 사람들을 가까이 해야 하고 정중하게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발표된 후에 표절로 밝혀지면, 감당할 수 없는 곤경에 처하게 됩니다.
-이 조언에 공감하지 않을 이유는 하나도 없다.
• 시간과 돈을 어디에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도서구입에 인색하고 음주나 명품구매에 거침없다면 학자로서 문제가 있습니다. 읽을 책이 없으면 읽어야 할 이유까지도 사라집니다. 책을 구입하고 자료를 복사하는 데 주저하지 마십시오.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더라도 앞으로 필요할 것으로 판단되면 구입해야 합니다. 꼭 필요한지를 따지는 것은 책을 사지 않으려는 이유를 찾는 것과 같습니다. 그 문헌들을 읽거나 가까이 두고 보아야 아이디어가 떠오르게 됩니다.
-이것도 마찬가지. 다만 자료 '복사'..는 다소 옛날 이야기가 아닐지. 나는 아이패드를 사고 나서 이렇게 인쇄해서 보관해두고 있던 논문 수천 장을 다 버리게 되었다. 그 이후에 딱히 생산성이 떨어졌다고 느껴본 적은 없다 (더 떨어질 생산성이 없어서일지도).
• 새 책을 구입했을 때나 새 논문을 복사했을 때에는 즉시 첫 장을 읽어두십시오. 그러면 책과 논문이 생경스럽지 않게 됩니다. 다음에 읽을 때에는, 시작하는 기분이 적게 들어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구입한 책과 복사한 논문을 도서관 자료처럼 대하지 마십시오. 읽은 부분에 흔적을 많이 남겨두십시오. 아이디어가 떠오르거나 반론이 생각나면, 그 쪽의 여백에 적어두십시오. 그것이 저자와의 토론입니다. 그 토론은 자신이 쓸 글의 쏘시개가 됩니다.
-이 조언도 100% 공감한다. 바로 조금이나마 읽어두고, 항상 여백에 뭔가를 써놓는 습관은 좋은 것 같다. 이렇게 해놔도 정작 90%는 까먹고 안보게 된다!
• 학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십시오. 학회의 주체로서 활동하고 손님처럼 처신하지 마십시오. 학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긍정적 모형들과 부정적 모형들을 많이 접해보십시오. 좋은 발표들로 모범 사례들을 만들어가고 실망스러운 발표들을 들을 때에는 그 이유들을 분석해보십시오. 학회에 가면 학문 활동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있습니다. 학회에 가면 필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감성적 자극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조언도 공감한다. 다만 요즘 정치학계에서 학회의 순기능적 역할은 조금씩 떨어져가는 듯 하다..정말 최신 연구, 좋은 연구들은 이제 대규모 학회에서 점점 사라져가고, 랭킹 높은 학교들 단위로 주최하는 내부 컨퍼런스, 혹은 소규모 컨퍼런스들에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공유되는 듯.
• 지도교수나 선배가 여러분의 인생을 결정해주지 않음을 명심하십시오. 학위논문을 작성할 때 지도교수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배의 조언은 학위논문을 완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들의 지도와 도움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그들에게 종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홀로서기가 시련이듯이, 학자로서의 독립도 어렵습니다. 은사나 선배에의 종속은 그들의 요구 때문으로 이루어지기보다는, 젊은 학자들이 스스로 안주하려는 자세 때문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지도교수나 선배가 내 인생을 결정해주지 않는다는 말은 공감하지만, 은사나 선배에 종속되는 것이 신진 연구자들이 스스로 안주하려는 자세 때문이라는 경우가 더 많다는 말은 공감하기 어렵다. 나라를 막론하고 학계에 명백하게 존재하고 있는 위계 관계를 간과하고 있는 말이 아닐지. 학위논문을 작성할 때 지도교수가 절대적으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면 대부분의 종속이 그 지도교수의 암묵적/명시적 영향력에 의한 결과라고 보는 것이 더 가능성 높은 추론 아닐까?
• 걸작(傑作)이나 대작(大作)보다 습작(習作)에 충실하십시오. 논문을 쓰지 못하는 학자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걸작에 대한 집착입니다. 이들은 다른 학자들의 논문들을 시시하다고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하찮게 평가한 논문들과 비슷한 수준의 논문을 쓰지 않으려고 애쓰다가 논문을 쓰는 데 엄청난 압박을 느낍니다. 걸작에 대한 소망은 학자로서 당연히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걸작은 쉽게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걸작을 지향한 논문이라고 해서 걸작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논문을 쓸 때마다 최선을 다하고 그 논문들이 쌓여지면서 걸작과 대작이 가능해질 뿐입니다.
-100% 공감한다. 걸작이나 대작에 대한 집착은 완벽주의로 이어지고, 결국 투고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어진다. 어느 정도 퀄리티에 대한 자기 검열은 있어야 겠지만, 그게 과하면 논문 자체를 내기 어려워질 수 있다. 언젠가 트위터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당신이 낸 모든 논문이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생각하지 마라." 우리가 만들어낸 모든 지식은 결국 더 발전된 지식에 의해 대체될 운명이다. 나라고 예외일거라 생각할 이유도 없고, 대체될 운명을 두려워할 이유도 없다. 모든 모델은 다 틀렸지만, 어떤 모델은 다른 모델보다 더 유용하다. 마찬가지로, 모든 논문은 다 틀렸지만, 어떤 논문은 다른 논문보다 더 유용하다. 그 평가를 반드시 내가 하려고 하지 말자. 내가 내리는 평가가 100% 옳은 것도 아니다. 남(리뷰어)의 평가를 받아보기 위해 투고하는 것이고, 그 평가를 바탕으로 내 논문을 더 유용하게 만들 수 있다. 그게 쌓이다 보면 결국 좋은 수준의 논문이 나오게 될 것이고, 그런 수준의 논문이 쌓여서 나만의 확고한 연구 프로그램이 만들어지게 되는 건 아닐까.
• 학자의 길을 선택한 후에는 곧바로 연구업적에 대한 압박이 시작됩니다. 교수직을 구하려면 반드시 연구업적을 충분히 갖추어야 합니다. 많은 대학에서 연구보고서는 연구업적으로 평가해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공저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합니다. 번역서에 대한 평가는 실망스러울 정도로 낮습니다. 번역보다 창작에 몰두하십시오. 번역은 손쉬워 보이지만 아주 어려울 뿐만 아니라 생색도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역했을 경우에는 지적 능력을 크게 의심받습니다.
-번역을 해본 적은 없지만, 업적 평가에서 매우 낮은 평가를 받는 항목이라는 건 들은 적이 있다. 연구업적이 정말정말 중요하다는 것도 너무나 명백한 사실. 다만 공저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최소한' 미국 학계에서는 이제 여러가지 전제조건이 붙어야만 통용되는 말일 것 같다. 제한적인 내 경험을 바탕으로 판단해 보았을 때, 이제 학계에서 공동 연구는 내가 활발한 연구 네트워크 그룹 안에 속해있다는 일종의 시그널로 취급되기 시작한 것 같다. 점점 더 올라가는 실적 기준과, 점점 더 다양한 스킬이 하나의 논문 출판에 필요해지면서 더 많은 숫자의 학자들이 공동 연구에 신경을 많이 쓰기 시작했고, 학계에서도 공동 연구를 단독 연구에 비해 뒤떨어지는 시그널로 항상 바라보지만은 않는 것 같다 (최근에는 박사학위 논문/잡마켓 페이퍼마저 공동 연구가 허용된다고도 하니..). 물론, 공동 연구가 단독 연구와 비슷하게/혹은 그보다 더 높게 취급받는 경우는 대개 비슷한 연차의 연구자들끼리의 작업일 경우인 듯 싶다. 여전히 지도교수/대학원생이 공동 연구를 한 경우 대학원생의 역할을 부차적인 것으로 (암묵적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
• 학자가 되고 난 후에는 저서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압박도 만만치 않습니다. 도서관이나 서점에 들러 책을 찾을 때 다른 학자들이 쓴 책들만 보이면 상당히 우울해집니다. 여기에 더하여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동료들이 교과서와 전공서를 출판할 때에는 뒤처지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학자들이 젊었을 때부터 교과서 집필을 서두릅니다. 교과서 집필은 생각과는 다르게 아주 어렵습니다. 교과서에 담길 내용은 대부분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쉽게 쓸 수 있을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논문과는 다르게, 교과서 집필은 다른 학자들도 알고 있는 내용들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구성하는 작업이어서 표절의 가능성도 아주 높고, 오류가 있을 경우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학자로서 최소 10년은 지난 후에 교과서 집필을 고려하십시오.
-교과서 집필이 각 나라의 학계에서 어느 정도의 취급을 받는지 나는 아직 정확하게 알지 못해서 이 부분에 대한 평가는 보류하고 싶다. 분명 미국 학계/한국 학계에서 대가들이 교과서 집필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굉장히 활발하게 연구하고, 평판이 좋은 학자들이 (어쩌면 굉장히 다수) 교과서 집필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최소한 미국 정치학계에서는).
• 학회에 투고한 논문이 게재되지 않더라도 속상해 하지 마십시오. 학회에서 발행되는 정기학술지에의 게재 가능성은 50퍼센트 수준입니다. 까다로운 학술지의 탈락률은 60퍼센트를 넘습니다. 그리고 학계의 초보인 여러분이 중견․원로 학자들과의 경쟁에서 유리할 리도 없지 않습니까? 아이디어를 짜내어 논문을 작성한 후 발송했더니 투고양식에 맞지 않는다고 퇴짜를 맞거나, 자세히 읽어보지도 않고 게재불가 판정을 한 심사평을 받을 수도 있으며, 최신 문헌과 자료를 사용했는데 이에 대해 문외한인 심사자를 만나 거부될 수도 있습니다. 게재불가를 받은 자신의 논문보다 훨씬 못한 논문들이 게재되는 난감한 경우도 겪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문을 투고해야 합니다. 학회에 투고하기 전에 학회 편집위원회보다 더 까다로운 사람들로부터 예비 심사를 받기를 권합니다.
-이 부분은 공감하지만, 지난 13년 간 학술지 탈락률은 엄청난 속도로 상승한 듯 하다 (물론 여기서 언급하는 탈락률이 국내 발간 학술지라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미국 정치학계에서 널리 읽히는 소위 '탑티어' 저널들은 게재율이 한 자릿수로 떨어진지가 오래된 듯 싶다.
-학회에 투고하기 전 편집위원회보다 더 까다로운 사람들로부터 예비 심사를 받기를 권한다 라는 조언은 좋은 조언이지만 동시에 다소 애매함이 있는 조언이다. 편집위원회가 만약 리뷰어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쓰인 것이라면, 누가 리뷰어가 될지 투고자 입장에서는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에 내가 평가를 부탁한 사람이 리뷰어보다 더 까다로울지, 덜 까다로울지 알 방법이 없다 (물론 그 사람이 리뷰어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정말 높은 티어의 저널에 투고하려는 사람들이 정말 많은 학회에서 해당 논문을 계속 발표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논문을 노출시키고, 평가를 미리 받으려고 하는 경우를 보았다. 나도 공동 작업하는 연구 중 하나의 논문에 대해서 이런 방법을 썼는데 (엄밀히 말하면 공동 저자가 이 방법을 썼고 나는 다소 수동적으로 따라갔다), 결과적으로는 별로 효과가 없었다. 내가 추측하는 이유는 하나: 사람들은 익명 뒤에 숨을 수 있을 때 본심을 드러낸다. 학회에서 청중의 한 사람으로써 내 논문을 평가할 때랑, 익명 뒤에 숨어서 내 논문을 평가할 때 태도가 매~우 달라질 수 있다. 결국 모든 비판을 다 예측해서 미리 대처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과도한 완벽주의는 논문 투고에 장애물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계속해서 논문을 투고해야 한다"라는 조언에는 공감한다.
• 학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학문 활동을 쉽게 생각합니다. “앉아서 책만 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학문은 소일거리처럼 책만 보는 일이 아닙니다. 논문작성은 피를 말리는 작업입니다. 이 일을 오랫동안 해 온 저도 논문을 작성할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논문은 다른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글이 아닙니다. 인문사회계에는 깜짝 놀랄 일이 많지 않습니다. 논문의 주제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분야에서 찾아야 합니다. 논문은 새로운 것을 밝히는 작업이라는 점에 집착함으로써 낯선 분야에서 주제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어느 정도 동의한다. 물론 나는 운좋게도 내 주위에 내 일을 '앉아서 책만 보는 직업'이라고 폄하하는 사람이 없었다.
• 논문을 쓰려면 책상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논문의 아이디어는 직감(hunch)에서 나올지 몰라도 논문 글쓰기는 분명히 인내를 요구하는 노역입니다. 책상에 붙어 있으려면 책상에 소일거리를 준비해 두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늘리십시오. 컴퓨터는 최상의 제품을 구비하십시오. 프린터는 빨리 인쇄되는 제품을 구비하고 자주 인쇄하십시오. 퇴고는 반드시 모니터보다는 인쇄물로 하십시오. 퇴고할 때에는 다른 사람의 논문을 심사하듯 비판적으로 살펴보십시오. 논문의 초고를 작성했을 때쯤이면 내용을 거의 외우게 됩니다. 그래서 오류를 찾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아무리 세심하게 작성하더라도 초고에는 오류가 아주 많습니다. 이 오류들을 잡아내려면 그 논문을 남의 논문처럼 따져가며 읽어야 합니다. 앞에서부터도 읽고, 뒤에서부터도 읽어야 하며, 중간부터도 읽어야 할 뿐만 아니라 오래 묵혔다가 다시 읽어보기도 해야 합니다. 자신이 쓴 글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방법은 모두 동원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이유는 학회에 투고했을 때 심사위원들이 남의 글을 비판하듯 읽기 때문입니다. 논문심사자들은 심사대상 논문에 대해 호의적이 아닙니다. 이들은 익명이기 때문에 객관적이며 탈락률을 높여달라는 요구를 받을 때에는 아주 냉정해집니다.
-매우 공감한다. 글쓰기는 인내를 필요로 하고, 내 원고의 오류는 내 눈으로 봤을 때 정말 찾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가끔 소위 '정찰'용 목적으로 논문을 투고한다. 어느 정도 퀄리티를 갖추었다고 판단하고, 어느 정도 주위에서 피드백을 받은 다음이면, 일단 투고한다. 이러한 투고 방식이 학술지들에 과다한 리뷰 부담을 준다는 이유로 비판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다. 글쎄, 원칙적으로는 일부 동의할 수 있지만, '찔러보기'식 의도가 단 1%도 없는 상태로 투고하는 글이 도대체 얼마나 될까? 게다가 저널 출판을 결정하는 것은 단순히 퀄리티만이 아니다 (그렇게 믿는다면 매우 나이브한 관점이라고 100% 단언할 수 있다). 리뷰어 선정, 저널 핏 등등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요인들이 너무나도 많다. 저널 핏이라는 것도 각 저널마다 매우 구체적으로 정립되어 있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확실성은 항상 존재하고, 그런 불확실성이 있는 한 투고자는 항상 어느 정도의 '찔러보기' 의도를 가질 수밖에 없다.
• 학자의 길을 선택한 후에는 반드시 지적 업적을 갖추어야 합니다. 연구업적이 부족하면, 학계에서 설 땅이 별로 없습니다. 부족한 연구업적을 다른 것들로 보완하는 일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떳떳하지도 않습니다. 쫓기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기 때문에 항상 불안하고 우울해집니다. 자신의 전공영역에서 발간되는 국내외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들을 체계적으로 점검하고 관심이 끌리는 논문들은 복사하여 가까운 데 두십시오. 그 논문들을 끈기 있게 파고들면, 여러분이 써야 할 글의 주제와 소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더 할 말이 있을까. 연구 업적이 부족하면 학계에서 설 땅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하루도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이렇게 글을 써놓고 보니, 지금 시점에서 보아도 좋은 교훈이 많이 담겨 있는 좋은 글이다. 어떤 점은 학계의 냉혹한 현실을 그냥 써놓은 것이기도 하지만, 어떤 부분은 처음 학계에 발을 담그는 사람들이 자칫 간과하기 쉬운 점을 짚어주고 있기도 한다. 대체적으로 볼 때, 연구자가 갖춰야 할 기본적인 자질들에 대해서는 굉장히 오래도록 곱씹어볼만한 교훈들을 알려주고 있는 것 같고, 학계에 대한 구체적인 현실에 대해서는 다소 올드한 이야기도 있는 듯 하다. 그것은 물론 시대가 변하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한 5-6년 쯤 뒤에, 어떤 입장에서 내가 어떤 관점으로 다시 이 글을 바라보게 될지 궁금해진다.